2019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아이리시맨(The Irishman)은 마틴 스콜세지가 수십 년간 다듬어 온 마피아 장르의 문법을 차분히 결산하는 대작이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가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이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붙잡는 건 총성과 배신이 아니라 기억, 후회, 충성, 그리고 시대 속에서 사라지는 삶의 무게다. 실존 인물 프랭크 시런의 회고록 I Heard You Paint Houses를 토대로, 20세기 중반 미국의 정치·노동·범죄가 얽힌 암부를 209분 동안 천천히 더듬는다. 길다는 인상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는 감각이 남는 작품이다. 아래에서는 세 가지 축—인물 서사, 역사적 배경, 연출 방식—로 핵심 감상 포인트를 정리한다.
인물 서사 — 프랭크 시런의 삶과 ‘침묵’이 남긴 공허
이야기는 요양원의 노년 프랭크가 과거를 회고하는 액자 구조로 진행된다. 그가 묻는 질문은 “왜 그랬나”보다 “그 뒤에 무엇이 남았나”에 가깝다. 2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트럭 운전사로 살던 그는 우연이 겹치고 환경이 밀어붙이는 대로 조직의 일을 맡는다. 프랭크에게 범죄는 종종 “나에게 주어진 일”, 삶의 방식은 명령 수행과 감정 억제다.
프랭크의 첫 축은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다. 말수 적고 냉정한 보스는 그를 도구이자 가족처럼 품고, 프랭크는 행동으로 증명하는 충성으로 응답한다. 두 번째 축은 지미 호파(알 파치노)다. 호파는 그를 형제처럼 대하고, 프랭크는 정치·노동·조직의 경계에서 그를 지킨다. 그러나 권력의 균형이 기울자, 프랭크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 전체를 부정하는 결정적 임무를 수행한다. 호출, 방문, 방아쇠—감정은 절제되어 있고 행위는 단호하다. 이후 그의 삶엔 죄책감과 단절이 서서히 침전한다. 딸 페기의 차가운 시선, 멀어지는 가족, 비어 있는 식탁이 그를 둘러싼다.
결말부의 “문은 열어두세요”라는 한마디는, 용서의 가능성을 청하는 소리이자 스스로의 공허를 확인하는 소리로 들린다. 아이리시맨은 성공한 갱스터의 무용담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이 만든 고립을 기록한 초상에 가깝다.
역사적 배경 — 실존 인물과 사건이 비추는 미국의 그림자
영화의 많은 인물과 사건은 실존을 전제로 한다. 프랭크 시런의 회고는 지미 호파 실종(1975)에 대한 논쟁적인 진술을 포함하고, 작품은 그 진술을 토대로 사실과 상상을 교차 편집한다. 전미트럭노조(Teamsters), 이탈리아계 마피아 네트워크, FBI의 감시, 케네디 시대의 정치적 충돌이 배경을 이룬다. 전후 산업화가 가속되던 미국에서 마피아는 단순 범죄집단을 넘어 노동·정치·자본과 결탁한 그림자 권력으로 기능했고, 프랭크 같은 인물은 그 거대한 톱니바퀴의 한 조각이었다.
영화가 간간이 제시하는 등장인물의 최후 자막은 에필로그 이상의 효과를 낸다. 누군가는 법정에서, 누군가는 골목에서, 누군가는 잊힌 방에서 끝을 맞는다. 화려한 전성기 뒤에 남는 건 영광이 아니라 고립의 통계라는 사실을 담담히 각인시킨다.
감독의 연출 방식 — 스콜세지의 진화, 폭력의 끝은 ‘정적’
스콜세지는 이번에 속도 대신 정적, 과시 대신 완곡함을 택한다. 좋은 친구들, 카지노에서 익숙했던 빠른 편집과 전광석화 같은 리듬은 줄이고, 멈춤과 침묵으로 시간의 무게를 들리게 한다. 살인은 화법처럼 일상적이고, 그래서 더 섬뜩하다. 폭력을 미화하지 않고, 폭력 이후의 공허를 응시한다.
러닝타임 209분은 이야기의 낭비가 아니라 일생을 통째로 통과하기 위한 선택이다. 배우를 한 사람으로 관통시키는 디에이징(De-aging)은 단지 기술적 자랑이 아니라, 한 얼굴 위에 야망–갈등–고립이 연속적으로 퇴적되도록 만든 장치다. 재즈·올디스 중심의 음악 배치는 시대를 환기하면서도 과장하지 않고, 절제된 조명과 미장센은 관객의 시선을 인물의 침묵으로 모은다. 후반 요양원 시퀀스의 길고 느린 호흡은, 이 영화가 결국 기억의 질감을 다루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결론 — 시간, 기억, 그리고 선택의 잔여물
아이리시맨은 범죄극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끝내 묻는 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그 끝에 무엇이 남는가다. 프랭크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구조와 그로 인해 훼손된 관계를 마주하게 된다. 영화를 덮고 나면 질문이 남는다.
당신은 어떤 가치를 위해 살고 있나요?
그리고 그 선택의 끝에 무엇을 남기고 싶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