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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산행 움직이는 사회의 단면 , 계층 갈등 , 인간의 본성 , 희생과 공동체

by sky6325 2025. 10. 24.

 

현대 한국 사회를 향한 질문, 열차 위의 축소판

‘부산행’은 표면적으로는 좀비 재난 영화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가 가진 균열과 욕망, 그리고 우리가 부끄러워 외면해 온 민낯을 정면으로 비춘 작품입니다. 재난의 크기만 커진다고 해서 인간의 도덕성도 덩달아 커지지는 않는다는 사실, 반대로 작은 선택 하나가 공동체 전체의 향방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꾸준히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부산행’은 단순히 무섭고 빠른 좀비가 뛰어다니는 영화로 남지 않습니다. 열차라는 닫힌 공간, 서로 다른 삶의 결이 섞여 있는 사람들, 그 사이를 관통하는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질문을 오래 붙잡게 만듭니다.

1) 열차라는 제한된 무대: 움직이는 사회의 단면

영화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열차를 무대로 삼습니다. 칸과 칸을 잇는 좁은 복도, 문을 사이에 둔 대치, 스크린도어와 플랫폼, 터널의 암전까지—공간의 성격이 바뀔 때마다 인간의 태도도 달라집니다. 열차가 달릴수록 ‘안전지대’는 줄어들고,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세게 문을 밀어 닫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빨리 달리는 교통수단 안에서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멈춰 서서 서로를 판단하고 배제합니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좁은 공간을 택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누가 문을 여는가, 누가 문을 닫는가. 그 단순한 행위가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이 됩니다.

2) 계층 갈등: 한 칸 차이의 냉혹함

‘부산행’은 계층 갈등을 말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같은 열차, 다른 칸의 인물들을 충돌시키죠. 펀드매니저 석우, 임산부 성경과 육체노동자 상화, 학교 야구부 학생들, 노숙인, 회사 임원 용석 부장까지—현실에서 쉽게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한 칸에서 마주 앉습니다. 재난이 닥치자 상류층에 가까운 인물들은 “안전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문을 닫고, 약자들은 서로 손을 붙잡고 움직입니다. 갈등이 절정에 이르는 중반부, 서로 다른 칸의 생존자들이 의심과 두려움으로 벽을 쌓는 장면은 선명합니다. 이때 유리문은 단순한 차단막이 아니라 편견의 상징이 됩니다. “혹시 감염됐을지 몰라.” 그 한 마디가 공포와 보신주의를 합리화하고, 누군가의 생존 가능성은 그 자리에서 지워집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위기 때 더 단단해지는 공동체’라는 낭만 대신, ‘위기 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격차’를 보여줍니다.

3) 인간의 본성: 이기심과 연대 사이

좀비는 감정이 제거된 순수한 충동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일부 인간은 그보다 더 계산적이고 더 잔인합니다. 대표적으로 용석 부장은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자신의 생존을 쌓아 올립니다. 그는 의심을煽り(煽動)하고, 책임은 회피하며, 결국 더 큰 참사를 부릅니다. 반대로 상화는 몸으로 길을 만들고, 석우는 처음엔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만 끝내 달라집니다. 어두운 터널 구간에서 소리와 시야를 이용해 좀비 무리를 피해 이동하는 장면, 야구부 학생 영국이 방망이를 쥐고 길을 여는 장면은, 개인의 능력이 ‘나만 사는 기술’이 아니라 ‘같이 건너는 기술’이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걸 보여줍니다. 인간은 괴물과 영웅 사이 어디쯤에서, 선택으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설 건가요?”

4) 희생과 공동체: 죽음의 다른 이름, ‘다음 세대’

이 작품에서 희생은 값싼 미화가 아닙니다. 상화는 배 속의 아이와 아내를 떠올리며 등을 맡기고, 기관사는 끝까지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석우는 딸 수안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문턱에서 발을 뗍니다. 그래서 결말이 더 오래 남습니다. 터널 앞, 군인들의 총구가 겨누어진 그 어두운 순간, 수안의 떨리는 노랫소리가 들릴 때 관객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요. 살아남은 이들은 임산부와 아이—곧 ‘미래’ 그 자체입니다. 영화가 끝까지 붙잡은 공동체의 의미는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다음의 우리”를 위한 선택입니다. 희생은 그런 의미에서 비극의 완성 아니라, 희망의 시작으로 기록됩니다.

연출의 디테일: 속도, 소리, 시선

연상호 감독은 속도로 서사를 밀어붙이되, 장면의 호흡을 절약하지 않습니다. 객실 문이 닫히는 찰나의 틈, 플랫폼에서 눈이 마주치는 1초, 터널 암전에서 들리는 숨소리—공포를 과장하기보다 관객의 상상력을 불러오는 방식이 탁월합니다. 사운드는 특히 정교합니다. 차륜 소음과 비상방송, 군중의 웅성, 좀비의 괴성과 인간의 오열이 겹치며 혼란을 체감하게 만듭니다. 색감도 의미를 나눕니다. 차가운 회색과 파란빛은 냉혹한 현실을, 따뜻한 톤은 짧은 연대의 순간을 비춥니다. 무엇보다 ‘문’과 ‘유리’의 반복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일관된 시각적 언어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르는 것과 잇는 것의 차이를 관객에게 꾸준히 묻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는 질문

‘부산행’을 보고 나면, 묵직한 질문이 따라옵니다. 재난이 커질수록 도덕은 더 선명해지는가, 아니면 더 쉽게 교환되는가. 안전을 이유로 닫은 문은 정말 안전했는가. 나는 누군가를 의심할 근거를 찾는 데 익숙해진 건 아닌가. 영화는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 번—크든 작든—위기가 올 때, 우리는 어떤 문을 열고 어떤 문을 닫을 것인지, 그 선택의 순간을 준비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부산행’은 장르 영화의 외피를 입었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기록하는 리얼리즘에 가깝습니다. 좀비가 빠르게 달릴수록, 관객의 마음은 더 느리게 반성합니다. 그리고 그 느린 반성이야말로, 다음 칸으로 넘어가게 하는 진짜 힘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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